본문 바로가기
정신 건강 이야기/ADHD 생활기

ADHD 약 먹고 미라클 모닝 2주 체험 후기

by 벨리너린 2021. 2. 13.
728x90

요즘 미라클 모닝이 대세라고 한다. 사실 내가 중고등학생이던 시절부터 4시간 수면법, 아침형 인간 등 잠을 줄여 더 생산적이 되자는 류의 자기계발 서적은 굉장히 많았다. 미라클 모닝은 약간 다른 뉘앙스로, 아침 시간만은 온전히 고요히 내 시간으로 쓸 수 있으니 아침에 좀 더 일찍 일어나서 온전한 내 시간의 주인이 되자, 이런 의미인 것 같다. 

 

나는 사실 저런 류의 자기계발 서적을 별로 안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일단 ADHD를 가지고 태어난 나는 태어난 그 날 부터, 아니 어쩌면 엄마 뱃속에서부터 올빼미형 인간이었다. (나를 낳고 병원에서 집에 데려왔는데 내가 너무 밤에 잠을 안자려 해서 힘들었다는 어머니의 간증. 유치원때도 초등학생때도 밤에 잠이 안와 말똥말똥 하다가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유치원가고 학교가는게 너무 힘들어서 지각을 밥먹듯 했다.) ADHD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많이들 으레 그렇듯이 생체리듬이 남들보다 좀 미뤄져있는 경우다. 그렇기에 보통의 등교시간, 출근시간은 나에게 폭력에 가까운 고통이었고 가뜩이나 신경정형인에게 맞춰진 출근시간에 맞춰 수면 부족으로 사는 것도 힘든데 그보다 더 일찍일어나서 더 생산적인 인간이 되라고? 는 자기를 생산 수단 취급하는 자기학대 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내가 왜 미라클 모닝을 굳이 해보기로 마음 먹었을까? 베를린의 락다운 때문에 여러모로 상황이 너무 안좋아져서 잠깐 몇달간의 한국행을 선택한 차, 취업준비도 할겸 한국에서 한 달간의 인턴십을 하기로 결정했다. 인턴십 업무와 회사는 내게 더할나위 없이 감사한 기회였으나, 단 하나의 단점이 있었다면 집에서 멀어 하루 출퇴근 시간으로만 왕복 4시간을 대중교통에서 보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거기다가 베를린에서 락다운기간동안 찐 살을 다시 원래의 몸무게로 원상복구 시켜놓고 싶었고, 그러려면 적어도 6kg은 감량해야했다. 그래서 인턴십이 시작하는 날짜에 맞춰서 하루에 적어도 30분은 운동해야하는 온라인 PT 서비스도 신청했다. (출퇴근 시간을 생각하면 당연히 인턴십과 다이어트를 병행하기는 비현실적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지금의 과잉생산성과 번아웃의 사이클은 ADHD의 충동성과 비계획성이 만든 참사이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8시에 출발하고, 밤 9시에 집에 도착하면 저녁을 먹고 운동을 하고 잠들 계획이었지만, 출근 첫날 하루 4시간을 서울의 만원 지하철에서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면서 보내고 8시간 (+점심시간) 근무까지 마치고 돌아오니 죽을것 같이 힘들어서 전혀 운동까지 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회사에서 일하고 나를 위한 시간을 따로 내지 못하는 점도 마음에 안들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샤워하고 아침먹고 출근을 하자고. (원래 새벽 4-5시에 기상하는게 미라클 모닝의 정석인것 같지만 뭐 원칙적으로 출근시간보다 일찍 일어나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의미는 맞으니까.) 그렇게 나의 즉흥 미라클 모닝 체험기가 시작되었다.

 

아침에 식사로 먹고 가는 블루베리 요거트

그러면 평생 알람소리도 못듣고 끄고 자서 지각을 하던 내가 어떻게 갑자기 아침 6시에 벌떡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아침 식사를 챙겨먹고 샤워를 하고 집을 나서는 아침형 인간이 되었을까? 바로 ADHD 약 덕분이다. 사실 ADHD 약은 각성제이다. ADHD를 가진 사람들은 신경정형인보다 도파민 레벨이 낮아 각성이 제대로 안되고 다른 자극에 쉽게 주의력을 뺏기는 것인데, 메틸페니데이트를 비롯한 ADHD 약물은 각성도를 높여줘 ADHD 증상을 조절해준다. ADHD인들이 아침에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것도 남들보다 각성이 늦은 시간부터 시작되서이다. 

 

해외 ADHD 블로그에는 일어나고 싶은 시간 30분 전에 알람을 맞춰놓고, 잠깐 깨서 ADHD 약을 먹은 다음 다시 잠들어서 20~30분 후 각성 효과가 돌기 시작할 시점에 개운하게 일어나는 꿀팁이 공유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 역시 애플워치로 5시반~6시 사이에 가장 잠이 옅게 들었을 때 깨우도록 알람을 설정해놓고, 잠깐 일어나서 ADHD 약 (나같은 경우엔 메디키넷 10mg)을 먹고 다시 잠들었다. 나는 사실 각성효과가 빨리 도는 편이라 10-15분 후면 으레 저절로 깼지만, 혹시 만일에 상황을 대비해 6시 15분쯤에 또 다른 알람을 설정해 두었다. 원래는 8-9시간 자다가 7시간만 자고 일어나도 아침에 정신을 못차리겠는데, ADHD 약을 먹으니 5-6시간만 자고 일어나도 아침에 정신이 명료하고 피곤함도 별로 못느꼈다.

 

내가 사용하는 다노 온라인 PT 플랫폼

 

아침에 '회사를 가야해서', 즉 남이 정해둔 시간 때문에 일어나는 것 보다, '나를 위한 시간을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 훨씬 기분이 좋았다. 아침에 출근시간에 겨우 맞춰서 허둥지둥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정신 없이 급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 보다, 일찍 일어나서 천천히 내가 좋아하는 신선한 재료로 아침 식사를 해먹고, 내 몸을 위한 운동을 하면서 엔도르핀 도는 하루를 시작하고, 상쾌한 샤워를 하고 나가는 것이 훨씬 주체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출근길 압사 당할것 같은 지하철에 서있으면서도 나는 이미 아침에 나를 위한 양식과 운동을 제공했기에 좀 덜 서럽게 느껴졌다. (인파에 휘둘리지 않고 내 두 다리로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코어힘을 얻은 것은 덤이다.) 아침에 운동하고 두시간 출근만 해도 사무실에 도착하면 벌써 애플워치 활동 칼로리가 300kcal 이상이나 소모되어있었고, 아침을 성취감으로 시작하니 나머지 하루에도 내가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살도 분명 조금씩 빠졌고, 체중을 떠나서 매일 아침 거울에 조금씩 선명해지는 근육도 자랑스러웠다. 

 

결국 2주동안 하루에 평균 4시간 반 - 5시간 반을 자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블로그 포스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생산적인 하루를 보내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찬양하는 또 다른 글인가? 전혀 아니다. 미라클 모닝의 순기능을 분명히 인정하고, 이게 장기적으로도 잘 맞는 사람도 존재함 역시 인정한다. 미라클 모닝을 시작한 이후 아침 시간은 기적같이 좋았지만, 오후 퇴근 할 때 즈음 ADHD 약의 각성 효과가 떨어질 때면 저녁시간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퇴근하고 9시에 집에 도착해서 밥을 먹고 다음날 먹을 도시락과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화장을 지우고 잠자리에 드는 아주 기본적인것만 해도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시간은 일러야 11시경이었다. 그러나 또 가족과 대화하거나 베를린에 있는 친구들과 연락이라도 하는 날에는 11시 반에 눕게 되었고, ADHD인 특유의 '졸리고 피곤해서 죽을것같은데 잠자리에 들기조차 미루는' 성향 때문에 12시가 다 되어서야 잠드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뿐이랴, ADHD인은 수면 시간 뿐만이 아니라 수면의 질 자체도 나빠서, 아무리 6시간을 잔것 같아도 자다가 자주 깨서 실제 측정 수면량은 4시간 반밖에 되지 않은 날도 많았다. 많은 ADHD인들이 공감할 것이다. 일찍 일어나기보다 훨씬 힘든 것은 일찍 잠드는 것이라는 걸. 

 

이렇게 각성제의 힘을 빌어 수면량을 억지로 줄이고 다니니, 진심으로 뇌가 손상되어 가는 것이 느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일단 ADHD 약의 각성 효과가 떨어져 가는 퇴근 시간에 훨씬 건망증이 심해져서 퇴근할 때 마다 회사에 뭔가 놓고 왔다. (교통카드겸 체크카드를 두고 퇴근해서 다시 회사로 돌아가기도 했고, 에어팟을 두고 퇴근해서 다음날 두시간 출근길을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왔다.) 이것은 출근 첫주의 일이다. 그러나 출근 둘째주, 수면부족이 더욱더 축적되니 퇴근하고 저녁 시간대의 기억력과 인지 능력이 거의 뇌손상급으로 나빠졌다. 얼마나 나빠졌냐면,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내려마시고 가는게 소중한 루틴이었는데 아침에 누가 커피를 치워놨는지 도저히 보이지가 않아서 정말 울고싶을 정도로 속상한 채로 출근했다. (여기서 커피 하나 없어진걸로 울고싶어졌다는 거 하나만 봐도 감정적으로도 많이 예민해진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다음날 엄마한테 물어보니 '너가 전날밤 냉장고에 커피를 넣어 놓고 지금 무슨 소리 하는거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커피는 거기 있었고, 나는 언제 냉장고에 커피를 넣어놨는지 정말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날 지하철에서 팟캐스트를 들으려고 에어팟 케이스를 열었는데 오른쪽 에어팟이 없어져 있는 것이었다! 정말 멘붕인 상태로 출근해서 아무데서도 찾지 못해 절망하던 찰나, 엄마가 거실에서 에어팟 한쪽을 찾아줬다. 난 역시 집에서 거실에서 에어팟을 케이스에서 꺼낸 기억 자체가 전무했다. 그뿐 아니라 퇴근길에 너무 정신이 멍해져서 몇 번 다른길로 가려고 하고 심지어 역방향 에스컬레이터에까지 타려고 하는걸 동료들이 몇번 고쳐줬다. 오랜 기간 이렇게 억지로 수면량을 줄이고 살면 정말로 가성 치매나 조기 치매 급의 뇌손상이 올 것 같았다. 감정이 예민해져서 스트레스에 대한 역치가 낮아졌음은 물론이었다. 


밤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미라클 모닝이 정말로 기적같은 변화를 불러올 것 같긴 하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컨트롤 되지 않으니까 ADHD가 장애인 것이다. 아침에는 ADHD 약의 힘을 얻어 어찌 일찍 일어난다고 해도 밤시간에는 일찍 잘 수 있도록 도움을 받기가 힘들다. 게다가 수면의 질 역시 신경정형인보다 나쁘니 남들은 6시간 자고 산다고 큰 어려움 없을 수 있겠지만 ADHD인은 같은 시간을 자도 덜 잔 셈이 되니 더 큰 타격을 받았다.

 

인턴십 기간은 1달에 불과하니 앞으로 2주는 더 이 루틴대로 살아볼 예정이다. 밤시간이 더 힘들더라도 아침 시간은 훨씬 기분이 좋고, 온라인 PT를 결제한 이상 운동은 멈추고 싶지가 않으니까. 그리고 일단 실천해보고 나서야 내게 진정으로 맞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미라클 모닝을 못해서 안하는게 아니라, 해보니 장기적으로는 단점이 장점보다 커서 하지 않겠다는 결론은 자기효능감에도 분명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앞으로 2주간은 어렵겠지만 그래도 늦어도 11시까지는 잠자리에 드는 연습을 해봐야겠다. 그러나 그 이상동안 유지하는 것은,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자기 학대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많은 ADHD 치료 담론에서 '어디까지 신경다양인이 신경정형인의 기준에 맞춰서 고쳐줘야하는가'라는 토론이 더 많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특히 한국에서는 정신과 의사 등 치료자는 물론 ADHD나 다른 신경다양성을 가진 사람들까지 우리의 증상과 다름을 '틀림'으로 보고 신경정형인처럼 되는게 최종 목표인 것 처럼 이야기하는 경향이 더 높은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다르게 태어났을 뿐이고, 사회적 기준에서 말하는 '게으름', '부지런함', '생산성' 등의 가치를 좀 더 우리의 몸과 언어에 맞춰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ADHD인들이 약물치료까지 받아가면서 일찍 일어나서 오랜 시간 집중력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은 신경정형인의 기준으로 맞춰진 노동 구조에서 생계에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한 노력일 뿐이지, 그 자체로 다수의 기준이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항상 수면부족에 시달리며 학교에서 졸고 지각해서 벌점을 받던 유년 시절의 나를 생각해보면, 공교육에서 내 ADHD를 조기발견 해주지도 못했을 뿐더러 가뜩이나 어른보다 생체시계가 늦은 모든 어린이들을 어른의 시간에 맞춰 등교하라고 했던 건 어린이의, 특히 발달장애 어린이의 수면권과 교육권을 빼앗아간 아동학대가 분명했다. 그때 12년간 지속되었던 수면 부족은 분명히 평생 건강과 뇌 발달에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어린시절의 나는 내가 왜 남들보다 피곤하고 졸린지 모른 채로 체벌도 받고 생기부에도 기재될 정도로 게으른 아이라는 낙인에 찍히며 학교에 다녔지만, 이제 어른이 된 나는 이런 다수의 기준을 조금씩 바꾸고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다. 만약에 내가 아이를 낳아도 80%의 확률로 ADHD를 물려줄텐데, 굳이 내 아이가 아니더라도 여전히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자라나는 ADHD를 가진 어린이들을 위해서라도 내게는 폭력에 가까운 다수의 기준에 도전하고 바꿔야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발달장애 당사자인 나의 의무가 아니라, 여태까지 신경정형인들에 맞춰진 사회 구조에 살면서 알게 모르게 이득을 보고 살아온 비장애인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다시 미라클 모닝 이야기로 돌아와서, 내가 깨달은 것은 일찍 일어나는 것도 좋지만 나에게 가장 이상적인 것은 8시-9시 즈음 일어나서 건강한 아침식사를 하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일을 시작하고 끝내는 삶이라는 것이다. 코로나와 언택트, 재택근무, 그리고 자율근무제가 도입되는 시대에 불가능한 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찍 일어나는 것도 내 아침시간의 주인이 되겠다고 하는 일인데, 최종적으로는 언제 일하고 언제 쉴 것인가의 하루 시간 전체를 내가 결정하는 것이 더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이 아닐까.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 과연 진짜 내가 행복을 느껴서 하는 일일까, 아니면 남들이 자는 시간에 일어나서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야 자본주의에서 도태되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에 하는 일일까? 답은 자기 자신만이 알겠지만 내 건강을 바칠 가치가 있는 생산성은 없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