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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라이프

내가 더이상 사지 않는 옷들

by 벨리너린 2021.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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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학생으로만 살다가 이제 취직을 하고, 삶의 단계가 변하는 시기가 왔다. 이런 변화의 시기에 옷장을 재정비하는 사람들이 많을텐데, 나 역시 그렇다. 

 

누구나 옷을 입고 살아가고, 패션을 직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주기적으로 옷과 자신과의 관계를 재정비 하며 살아가야한다. 한 가지 옷만 입는 스티브 잡스나 마크 주커버그라 하더라도 나름대로 자신의 철학과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지위에 기반해서 의복에 대한 기준을 확고히 세운 사람들이다. 

 

나에게 옷은 무슨 의미인가? 내 직업과 라이프 스타일 속에서 옷은 어떤 기능을 하는가? 내가 ‘스타일’을 통해 나 자신과 세상에 소통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몸과 인생 단계가 변화는 시점에서, 나와 옷과의 관계를 재정비해보고, 20대 후반에 들어서며 이제는 더 이상 사지 않을 옷의 기준을 확고히 해 보았다.

 

20대 초반 당시 즐겨입던 옷들

  1. (스포츠, 기능성 의류가 아닌 이상) 천연 섬유가 많은 비중으로 혼방되지 않은 옷은 피한다
    • 20대 초반, 학생으로서 돈이 없으니 패스트 패션을 참으로 많이 구매했다. 한창 예뻐보이고 싶은 나이에 예산은 한정되어 있으니 질 좋은 옷을 구매할 여력이 아예 없었다. 그렇다보니 의류의 원단보다는 디자인과 가격만 보고 결정을 했고, 싼 가격의 예쁜 옷들 중 천연 섬유는 거의 없었다.
    • 그러다보니 폴리에스터 100%, 아크릴 100% 등, 전혀 통기가 안되는 옷들을 한여름에도 입고 다녔고, 심지어 신축성조차 전혀 없어서 움직이기도 불편했다. 세탁 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미세 플라스틱을 배출했을 것이 분명함은 물론이다. 
    • 상단의 20대 초반 당시 내가 즐겨입던 옷 중 빨간 재킷, 흰색 탑, 인조 가죽 치마, 노란색 카프탄이 그 합성섬유 100% 숨 안쉬어지던 옷의 예시들이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덕분에 20대 초반은 열심히 놀러 다니며 덥고 답답하고 땀흘리던 기억들로 가득하다. (노란색 카프탄은 겉보기에도 정말 별로이긴 한데... 뭐 저 나이때 아니면 언제 저러고 다니겠나.) 이젠, 통풍이 잘되는 옷을 입고 뽀송뽀송한 삶을 살고 싶다. 안녕! 
  2. 피부에 직접적으로 닿는 옷이라면, 집에서 스스로 세탁할 수 있는가?
    • 부지런하지 못한 내 성격상, 드라이를 맡겨야만 하는 옷이라면 귀찮아서 자주 안입게 되던지, 아니면 입고 계속 세탁을 미루면서 색이 누렇게 변해서 1-2년 이상 못입게 될 것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예언이다)
    • 20대 초반에 당연히 (!) 손빨래는 전혀 안했고, 이젠 혼자 살게 되어 손빨래는 스스로 해입는 편이다. 하지만 실력 좋은 드라이 크리닝은 여전히 너무 멀고, 또 비싸다. 그래서 셔츠, 블라우스, 바지 등 피부에 직접 닿는 옷이라면 집에서 스스로 세탁할 수 있는 옷이여야한다. 
  3. 아무리 예뻐도 불편할 정도로 짧거나 끼는 옷은 피한다.
    • 20대 초반엔 너무 짧거나 끼는 옷을 사서 최대한 날씬하고 예뻐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자꾸 치마를 내리고 옷의 길이에 신경쓰는 동안 현재에 집중하지도 못했고, 그런 모습은 그닥 매력도 없었다.
    • 이젠 어떤 옷을 입어도 당당하고 편안하게 활동하고 싶고, 내가 좀 덜 날씬해보이더라도 더 편안하고 당당한 모습이 더 매력적이리라고 믿는다.
  4. 이미 내 옷장에 있는 옷 절반 이상과 매치가 되어야 한다.
    • 그렇지 않을 경우 일단 자주 입지 못하게 된다. '특별한 날에 입어야지'의 특별한 날은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옷은 내 일상과 어울리고 내 일상을 빛나게 해주어야한다.
    • 그리고 내 옷장에 있는 옷들과 쉽게 매치가 안되는 옷이라면 아마 나와도 그렇게 잘 어울리는 옷은 아닐 때가 많다. 사람보다 옷이 더 돋보이는 경우가 된다. 
    • 20대 초반엔 각각의 옷이 얼마나 유니크한 색이나 패턴, 디자인을 가지고 있는지만 보고 판단했다. 영어로 Hanger Appeal (옷이 옷걸이에 걸려있을 때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 라고 하는 것 같은데, 이런 옷들이 내가 입었을때도 예뻐보이지는 않는다. 반대로, 옷걸이에 걸려있을 땐 지루해 보이는 옷이 내가 입었을 땐 정말 예뻐보일 수 있다. 이제 내 몸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예쁜 옷 보다는 나를 예쁘게 해주는 옷을 찾는 것 같다.
  5. 5년 후에도 내가 이걸 입고 있을까? 10년 후에는?
    • 20대 초반, 패스트 패션 위주로 사다보니 주기적으로 입지 않는 옷을 정리하고 나눠주고 버리는 것도 현타가 왔다. 몇 번 빨고 못 입게된 옷들, 금방 유행에 뒤쳐진 옷들을 정리하다보니 '이 돈 다 내가 쓴 돈인데...'라는 생각도 들고 환경에도 너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정리하고 나눠주는 시간이 아까운건 물론이다. 
    • 그래서 요즘엔 오래도록 입을 수 있는 옷을 찾고 있다. 5년 혹은 100번은 입을 수 있는 내구성과 심하게 유행타지 않는 디자인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5년전의 내가 이걸 예쁘다고 생각했을지, 10년전의 나는 어땠을지 생각해본다. 엄마가 물려준 옷들 중에 20년이 넘었는데도 엄청난 내구성과 퀄리티, 편안함, 그리고 뒤쳐지지 않는 디자인까지 갖춘 옷들이 있는데, 이런 옷들이 꼭 명품도 아니었다. 
    •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찾는 것의 장점은, 오히려 유니크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가끔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을 아이쇼핑하다보면 현기증마저 느껴지는데, 시즌마다 죄다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판다. 그래서 오히려 빈티지샵이나 부모님이 물려준 옷을 현대적 아이템과 매치해서 입을 때, 더 따라할 수 없는 특별한 느낌이 나는 것 같다. 
  6. 진짜 좋아해야한다. “괜찮네” 정도가 아니라 이거 입을 생각하면 기분 좋은 정도여야 한다.
    • 옷을 처음 샀을 때의 행복보다 계속 입으면서 느끼는 행복이 더 큰 옷들이 있다. 그런 옷들은 좋은 원단, 내 몸에 맞는 편안함도 있겠지만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자아를 표현해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건 디자인일수도 있고, 색이나 텍스쳐일수도 있고, 루즈핏이냐 실루엣을 드러내는 핏이냐의 문제일 수도 있다. 
    • 그 옷을 보고 '아, 이건 누가 봐도 내 꺼다.'라는 감이 올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만 옷을 사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기준으로 옷을 고르다보니 친구들도 이제 쇼핑하다가 어떤 옷을 보면 나한테 '야, 이거 딱 네 옷 아니냐'라고 한다. 패셔니스타는 아닐지언정 나만의 스타일과 분위기는 확고하다는 뜻이겠지?
  7. 옷의 가격을 보고, 원가 계산을 대충 해본다. 이 원단에 이정도로 손이 가는 패턴이면 과연 이렇게 낮은 (혹은 높은) 가격이 나올 수 있는가? 누군가는 내 소비로 인해서 생활비가 충분치 않을 임금을 받고있지 않는가?
    • 사실 이 포인트는 유튜버 쥐스틴 르꽁트 (Justine Leconte) 의 비디오를 보고 많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실 여기 써있는 많은 것들이 그녀의 채널을 보면서 더 깊게 생각하게 된 것들이다.) 친환경적이고 윤리적인 패션을 지향하는 패션 디자이너인 그녀가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옷들을 찬찬히 구석구석 살펴보면서 이런 원단은 얼마고, 이런 패턴 바느질은 어느정도 노동력이 들어가는데, 옷의 소비자 가격이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생활이 불가능한 임금을 받고 이 옷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 정말 맞는 말이다. 사실 이런 패스트 패션의 현실을 20대 초반엔 몰랐던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가난하다고 느꼈으니까 눈감고 살았을 뿐. 그러나 이제 취직을 하고 선진국의 높은 급여를 받는 지금은 누군가 나의 소비로 인해 착취당하는걸, 적어도 알면서 계속 하고 그 옷을 입고 당당하긴 힘들 것 같다.

20대 초반의 나 자신의 선택, 그리고 비슷한 선택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각자 라이프 스타일, 준거 집단, 사회적 외모에 대한 부담, 수입 수준이 다르니까. 또한 20대 초반 내가 만들었던 무수한 선택들이 내가 뭘 좋아하고 뭘 불편해하는지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됐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거니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좋아하는지 알아가며, 나이 들 수록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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