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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라이프

베를린, 여자, 자기만의 방

by 벨리너린 2021.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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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해서 방 구조를 바꿨다. 오랫동안 꿈꾸던 암체어도 마침 온라인 중고시장에 싸게 올라왔길래 남자친구의 도움을 받아 이고 지고 왔다. 암체어를 들여놓으니 침대도 사무용 의자도 아닌, 편하게 앉아서 책도 읽고 명상도 하고 일기도 쓰고 영화도 볼 수 있는 공간이 생겨서 너무 기쁘다. 처음에 이 집에 이사왔을 때 빈털터리 취준생 신분이었기에 방에 이케아 가구들밖에 없는게 조금 아쉬웠는데, 저렴하면서도 포근한 빈티지 암체어가 방에 들어오니 한결 더 편안해진 분위기이다. 

 

고등학교 시절, 영문학 시간에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처음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여자가 글을 쓰려면 고정적인 수입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그녀의 주장이, 당시 룸메이트 두 명과 한 방을 쓰며 기숙사 생활을 하던 내게 굉장히 와닿았다. 대학생이 되고, 대학원에 가서도 계속 WG (플랫 셰어)에서만 살다가 거의 1년 전 쯤에 처음으로 온전히 혼자 살게 되었다. 

 

사람이 혼자 살아보지 않고 내가 누구인지 과연 완전히 알아갈 수 있을까? WG에 살 때도 룸메이트들로부터 독립된 나만의 공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엌, 화장실 등 생활 공간을 온전히 나의 방식대로 꾸릴 수 없었다. 그러니 내게 맞는 생활 공간이 무엇인지 온전히 탐구할 자유가 없었다. 혼자 사는 공간 뿐만이 아니라, 충분한 자기만의 소득이 없으면 내 취향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케아 가구를 살 돈조차 빠듯했던 취준생 시절의 나는 이케아 가구 이외에 진정한 나의 가구 취향이 뭔지 탐구조차 해볼 생각을 못했으니까. 나만의 공간과 소득이 있다는 것은, 곧 내 시간의 주인이 보다 온전히 내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라도 누군가와 함께 살다보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내 시간을 쓸 일이 많아진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는 건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 시간을 예상치 못한 곳에 자꾸 쓰게 되면 내 인생이 원치 않았던 곳에 자꾸 쓰이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나도 언젠가는 가족을 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삶을 살고 싶지만, 가능한 최대한 지금처럼 내가 혼자 살면서 나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내가 나에 대해서 잘 알고 확신을 가질수록 내 주변 사람들과도 더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고등학교 3학년때, 아이 네명을 낳아 키우면서 한번도 일을 그만둔 적 없는 여성 변호사와 만나서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었다. 나는 어떻게 아이 네명을 키우면서도 커리어를 한 번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지 물었었고, 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지금은 네 인생에서 너만 생각할 때야. 인생에서 나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흔치 않으니 그런 고민은 하지도 말고 너에 대해서만 신경 쓰렴.'이라고 말했다. 당시 일종의 충격을 받았었고, 이젠 누구나 인생에서 한번 쯤은 이 정도의 자기만을 위하는 삶을, 이기적이라는 자기 검열 없이 살 수 있으면 한다. 

 

내가 베를린에 왔을 때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이 바로 이런 삶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롭고 온전하게 탐구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락다운이 지속되는 지금, 내 방이 바로 내 도시 베를린이 되었다. 내가 놀고, 배우고, 휴식하고, 사랑하고, 성찰하는 그 모든 공간이 지금 내 방이다. 꿈만 같았던 도시에 오고, 꿈만 같았던 나만의 아파트에서 나를 알아갈 기회를 갖게 되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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