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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건강 이야기/ADHD 생활기

집안일의 자동화 (1) - 식기세척기와 식료품 배달

by 벨리너린 2021.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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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안일과의 애증의 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분명히 중요한 일임을 알고, 그 작업 자체가 싫지는 않았다. 가끔 설거지 하면서 쏴아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평안을 느낄때도 있다. 하고나면 뿌듯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기분 내킬때가 아니고 이미 바깥일로 녹초가 된 상태이더라도, 매일 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카오스가 되는데다가 위생, 건강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ADHD와 발달성 협응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여성이라 집안일은 단순히 “싫은”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와 뇌기능적으로 어려운 영역의 문제였는데, 겉보기엔 비장애인처럼 보이니 사람들은 단순히 나를 게으르다고 비난했었고 “여자애가 저래가지고 어따 써먹냐”고 구박하던 친척들의 말은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작년까지 나조차 내 장애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조차 나 자신을 비난하고 채찍질했다.

아무튼, ADHD 약물 치료를 시작하고 집안일에 대한 애증의 관계는 많은 방면으로 해소되기 시작했다. ADHD 치료제 메틸페니데이트 알약을 처음 삼키고 일어나 설거지를 하면서 약빨이 돌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차분한 마음으로 설거지를 다 마치고 물기까지 닦는게 전혀 어렵지 않아서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뭐야, 신경정상인들은 여태까지 이렇게 쉽게 살았단 말이야?’ 처음엔 배신감이 좀 들었고, 점차 일으켜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 어설프게나마 집안일을 하려고 노력했던 과거의 나 자신을 안아주고 싶어졌다.

그러나 ADHD 치료를 반년넘게 하고 나서도, 여전히 집안일은 내게 버거운 인생의 문제였다. ADHD 치료가 발달성 협응장애를 고쳐주진 않기 때문이다. (일단 발달성 협응장애를 위한 작업치료를 받기 위해 진단 병원을 알아보고있는 중이다.) 내 손은 여전히 느렸고, 어떤 순서로 집안일을 해야하는지는 여전히 헷갈렸다. 이미 회사일로 녹초가 된 날에 내가 내손으로 밥을 해먹고 설거지까지 해야할 때는 거의 울고싶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집안일을 자동화하기로 결정했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 매일 내가 반복해서 해야만하는 일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사실 집안일의 자동화는 내 오랜 염원이었지만 취업을 하기 전까진 내 노동이 기계의 몸값보다 훨씬 저렴했기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취업 기념으로 정말 오랫동안 꿈꿔왔던 식기세척기를 장만했다.

내가 고른 모델은 KWASYO 사의 이동식 식기세척기. 총 399.90 유로였고 독일 아마존에서 구입했다. 나같이 부엌이 크지 않은 1인 가구에게 그냥 부엌 탁상위에 두고 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었고, 싱크대 배관에 직접 설치할수도 있지만 캠핑 등을 위해 굳이 설치하지 않고도 쓸 수 있다는 점이 구매 결정 이유가 됐다. (캠핑에 이고지고 갈 생각은 전혀 없고, 본인이 똥손이기 때문에 설치를 직접하지 못할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금방 사실로 드러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식기세척기 구입이 너무 만족스럽고 행복하다. 억울하게도 1인가구라고 해서 요리하는데 설거지 거리가 1/n 로 줄어들진 않는데, 그 설거지를 다 할 노동력은 나밖에 없다. 그러나 나를 먹여 살리는 것도 나 자신이기 때문에 일하고 들어와서 초라해진 체력으로 설거지 하는건 정말 힘들었다. 게다가 코로나로 재택근무라 하루 세끼를 집에서 해먹고 하루 세번 설거지를 하자면 체력도 시간도 너무 허비되는 느낌이었는데, 일단 나는 나에게 양질의 음식만 공급해주면 뒷정리는 식기세척기가 해주니 너무 편했다. 무엇보다 잉여시간과 잉여체력이 생겨 나를 더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활동에 쓸 시간이 늘어났다! 말인 즉슨 저녁 해먹고 설거지 하고 나면 힘들어서 쓰러지듯 자는게 아니라, 맛있게 먹고 설거지는 식기세척기에게 시키고 나는 스트레칭을 하던 덕질을 하던 진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혼자 사시는 분들은 공감할수도 있겠는데, 설거지 거리 생기는게 귀찮아서 아예 끼니를 대충 때우면서 체력이 나빠지고 체력이 나빠져서 더 끼니를 대충 때우게 되는 악순환도 생긴다. 식기세척기가 있으면 적어도 설거지 거리 나올게 귀찮아서 먹고 싶은 음식을 포기하진 않게 된다.

다만 처음 구매하고 약간의 시행착오는 필요했다. 독일 수돗물 특유의 경수 때문인지, 처음엔 투명한 유리가 뿌얘져서 나와서 적잖이 당황했었다. 그러나 구연산을 식기세척기 전용 세제와 함께 적당량 넣어주니 내가 손으로 하던 그 어떤 설거지보다 훨씬 투명하고 반짝이는 결과가 나왔다.


다음은 장보기의 자동화, Gorillas라는 앱이다. 장보기 배달 앱인데, 주문한지 10분만에 라이더님이 식료품을 집까지 배달해준다. 사실 기계가 아닌 인간의 노동력에 아웃소싱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동화는 아니지만, 거의 이틀에 한번꼴로 장보는 시간과 체력을 엄청 단축시켜줬다.

혹자는 게으르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 서비스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나는 장보는게 너무 너무 힘들었다. 수퍼마켓 특유의 과잉 감각 자극도 힘들었고 (많은 신경다양인이 감각 자극에 예민하다) 무거운 것 혼자 양손에 들고 엘리베이터 없는 유럽식 아파트 계단을 올라오는것도 너무 힘들었다. 시간도 한번 다녀오면 최소 30분은 걸리는 것도 바쁜 일상에 너무 버거웠고, 한창 바쁠땐 장보기를 미루면서 건강이 나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차라리 나 자신을 착취하느니 타인에게 서비스 비용을 지급하고 아웃소싱 하는게 훨씬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평일에 일할 땐 주로 Gorillas 앱을 사용하고, 주말엔 유기농 마켓이나 아시안 마켓에 가서 Gorillas 앱에서 살 수 없는 것들을 산다. 배달료를 포함하더라도 REWE에서 쇼핑하는 것 보다 가격 차이 역시 별로 안난다. 이 역시 만족도가 아주 높다.


집안일의 자동화와 외주화에 생각보다 많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는것 같다. ‘내가 해야할 일을 남에게 미루는 죄책감’도 흔하고, 이런 죄책감은 여자라면 훨씬 더 많이 느끼는것 같다. 또한 기계가 아닌 사람에게 외주를 줄 때 계층적 죄책감도 느끼는 경우를 많이 봤다.

계급과 낮은 서비스 비용에 대한 고민은 항상 우리 사회 모두가 해야한다. 하지만 돈을 지불하고 외주화 하지 않는 대안은 이미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하루 8시간을 착취당하는 자기를 착취하거나, 다른 가족구성원의 노동력을 무급으로 착취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집안일을 “모두가 마땅히 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마땅히 할 수 일는 쉬운 일”이라는 편견을 은연중에 내포하는데, 집안일 역시 전문성과 기술을 요하는 일이다. (식당이나 청소 아르바이트를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단지 역사를 걸쳐서 여성이 돈을 받지 않고 한 시간이 길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을 기술을 필요로 하고, 제대로 되지 않았을 시 건강을 위협하는 일로 인식하지 않았을 뿐이다. 특히 나와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은 더더욱 밥벌이를 하면서 해내기 정말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가사와 같은 서비스 노동자의 권리를 계속 이야기하면서도, 더 많은 사람들이 가사 노동을 어떻게하면 더 자동화하고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다음 목표는 로봇 청소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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