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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건강 이야기/ADHD 생활기

ADHD가 어떻게 석사학위를 땄을까?

by 벨리너린 2021.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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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수업 안들어?!" 내가 놀자고 쿡쿡 찌른 앞자리 같은반 여자애가 목소리를 낮추고 짜증을 냈다. 때는 중1, 가정시간이었나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 질문에 새삼스레 놀랐다. 우리가 EBS 청춘드라마 주인공도 아니고, 중학생이 수업에 집중을 안하는건 당연한것 아니야? 사실 수업 안듣고 딴짓하기는 유치원때부터 있던 습관이었다. 항상 수업에 집중을 안하고 딴짓을 하다가, 정신 차려보면 다들 뭔가 열심히 쓰고 있는데 뭘 써야하는지 몰라서 짝꿍에게 물어보곤 했다.

 

사실 어릴적 부터 산만하고, 수업시간에 딴소리하며 떠들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가구 위에 올라가고 사고를 치는 등 교과서적인 ADHD였는데 나는 석사학위 논문을 제출한 직후에야 ADHD에 대한 병식이 생겼고, 그로부터 반년 후 진단받기에 이르렀다. ADHD 진단 사실을 알리자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했다. "넌 석사학위가 두개나 있는데 어떻게 ADHD야?" 하지만 이들은 모른다. 내가 대학원에 와서까지 수업중에 돌아다니다가 교수가 "5분후 쉬는시간 줄테니 제발 잠깐 앉아계세요."라고 했다는 것. 조별과제 할 때 평소 내가 하듯이 마지막까지 일을 미루다가 팀원들 맘고생을 엄청 시켰다는 것. (자기 변호를 하자면, 난 원래 마지막까지 미뤄두고 닥쳤을 때 해야 아드레날린이 넘쳐 집중을 해서 벼락치기로 점수를 잘 받아 왔었고, 내 입장에선 시간이 많은데 굳이 일찍 시작하지 않았단 이유로 전전긍긍하는 팀원들이 이해가 가지 않고 비효율적으로 보였다. 진단을 받고 약물치료를 시작한 지금은 팀원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아무튼, 약물치료를 시작한 지금은 당장 데드라인이 5시간 후가 아니더라도 앉아서 차분히 집중하는게 훨씬 쉬워졌지만, 어쩐 운명의 장난으로 내가 전업 학생으로 공부하던 시절은 약물치료 이전이었기 때문에, 약물치료 없이 내가 어떻게 공부해서 나름 반에서 1등도 하고, 명문대도 입학했고, 석사 학위 논문도 제출했는지 써본다. 그러나 내가 약물치료 이전의 공부 경험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약물치료가 필요없다는 말을 하려는건 전혀 아니다. ADHD가 진단되었고 약에 대한 부작용이 없다면 약물치료가 선행되는게 베스트이다. ADHD 환자가 약물치료 없이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성취하는 것엔 그만한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미성년자인데 부모님이 정신과를 데리고 가지 않아줘서 약물치료를 못받는 학생들이나, 혹은 부작용 때문에 약물치료를 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약물치료를 하지 않는다면 차선의 방법은 무엇인지 글을 써본다. 

 

1) 내 뇌가 남들과 다름을 인정하고 내게 맞는 공부 전략을 짜기 

ADHD가 집중을 못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도파민과 도파민 수용체가 낮아서라고 보면 된다. 우리 뇌는 집중을 하기 위해서 도파민이 필요한데, 이게 선천적으로 낮게 태어난 ADHD인들 같은 경우엔 약물 치료 없이 집중을 하기 위해서는 도파민을 어느정도 높여줘야한다. 이 도파민을 자연적으로 높여서 ADHD인이 초집중 (hyperfocus, 과집중이라고도 한다)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1) 흥미, 2) 긴박성, 3) 새로움 , 4) 감각자극 중 하나라도 충족시켜줘야한다. (우리애는 비디오 게임을 4시간동안 집중해서 하는데 어떻게 ADHD냐는 부모님들, 비디오 게임은 이 네가지 모두를 전략적으로 충족시키고 공교육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다.)

 

긴박성의 경우엔, 시험 전날에 시험범위를 통째로 공부하거나 과제 제출 전날에 레포트 30장을 써내는 초집중적인 경험을 이미 어느정도 다들 경험이 있을 것이다. (ADHD 진단을 받았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갑자기 무리해서 밤을 새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에, 나는 수도 없이 해왔지만 수명을 깎아먹은 기분이 들어 별로 추천할순 없다. 흥미를 높이는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나같은 경우에는 역사를 공부할 때 당시 좋아하던 아이돌을 역사적 인물로 상상해서 공부하거나, 외국어의 경우에는 그 언어로 TV 드라마나 팟캐스트, 노래 등을 들으면서 흥미를 높였다. 새로움은 공부 내용 자체에 새로움을 주거나 아니면 공부 환경에 새로움을 주는 방법이 있다. 공부 내용 자체는 지루할 때마다 과목이나 교재를 바꿔서 공부하는 것이 있고, 환경에 새로움을 주는 방법은 카페, 도서관, 집 등 장소를 바꿔가면서 공부하는 방법이다. 감각 자극이 내가 가장 추천하는 방법인데, 공부를 하면서 동시에 방해가 되지 않는 감각적 자극을 추가하는 것이다. 나는 알록 달록 형형색색의 싸인펜으로 필기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색깔별로 내용을 구분하는데도 도움이 되지만 그냥 시각적 자극이 늘어나면서 흥미와 집중이 올라가서이기도 하다. 또한 (되도록이면 가사가 없거나 못알아듣는) 음악을 듣는 것도 내가 즐겨쓰는 방법이다. 비트가 강하고 빠를 수록 집중해서 진도에 속력을 내기 좋다. 촉각적 자극을 제공해 집중을 도와주는 피젯 토이는 학창시절 사용해보진 않았지만, 곧 사서 써볼 예정이다. (우리나라에도 피젯 스피너가 유행한 적이 있는데, 그 외에도 여러가지 다양한 피젯 토이가 많다.) 

 

요점은, 신경정상인과 같은 방법으로 집중이 되지 않는 자신을 탓하지 말고 내 뇌에 맞춘 공부법을 계발하는 것이다. 1) 흥미, 2) 긴박성3) 새로움 , 4) 감각자극 을 잘 이용해서 내가 더 잘 집중할 수 있는 환경과 방법을 선택하자. 

 

2) 플래너 사용하기 

이 방법은 중학생때 부터 대학원생때까지 썼던 방법이고, 직장인이 된 지금도 쓰고 있다. 너무 흔한 방법이라 비결이라고도 못하겠는데, 의외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간단하게 말하면 To-do 리스트에 지나지 않는다. 불렛 저널 등 다양한 형태도 나와있고, 만들고 쓰는 방법은 유튜브에 많이 나와있다. 단기 작업기억 능력이 좋지 않은 ADHD인들에게 과제나 데드라인은 정말 까먹기 쉽고, 우선순위를 정렬하는 것 역시 어려워하기 때문에 뭐가 당장 제일 급하게 공부해야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위클리나 먼슬리 플래너에 각종 시험일과 데드라인을 빨간펜으로 표시해두고, 그러려면 매일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자세히 적어놓는 것을 추천한다. 일단위 계획은 최대한 자세하고 측정 가능한 목표를 해두길 추천하는데, 예를 들어 '수학 공부하기'와 같은 두루 뭉술한 단위의 일과가 아니라 '수학의 정석 10p-14p 풀기' 와 같이 확실한 범위를 정해두는 것이 좋다. 또한, 처음 몇일을 해보고 내가 세운 계획이 현실적이지 않았다면 조금 더 현실적으로 수정하는 융통성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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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장 효율적인 공부 방법을 찾기 

ADHD인들에게 집중력이란 한정된 자원이다. 그래서 최대한 열심히 공부하는 방법이 아니라, 최대한 적은 노력으로 역치에 도달하는 방법을 찾아야한다. 일단 본인의 인생 목표에 따라 역치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한데, 나는 고등학교 때 부터 A- 정도 받고 살면 인생에서 크게 성적때문에 손해를 보지 않고도 죽기 살기로 나머지 일상생활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평균 A- 정도를 내 역치로 설정해뒀었다. (A-에서 A+로 성적을 올리는 것에선 D에서 A-까지 올리는 정도의 에너지가 들어간다고 믿는 편.) 그 다음, 내 역치까지 도달하기 위해서 들여야하는 최소 노력과 결과를 생각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시험 전 문제집 1-2권 정도 풀면 90점은 넘길 수 있었다. (수학은 특히 못했기 때문에 2-3권이 필요했다.) 대학교와 대학원 시절엔 주로 주어진 문제에 정답을 적는 시험이 아니라 24시간에서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주고 주어진 주제로 에세이나 소논문을 쓰는 방식의 오픈북 시험이었다. 강의 계획서에는 30개가 넘는 필수로 읽어야하는 논문이 있었지만 실제로 시험에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은 2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학기 내내 그 어떤 논문도 읽지 않고 시험 전날에 대충 강의 슬라이드만 훑어뒀다가 시험 문제가 주어지면 그제서야 시험 문제와 관련있는 논문 2-3편을 심도있게 읽고 분석해 글을 써 A- 내지는 만점을 받았다. (부끄럽지만 출석이 필수가 아니었던 학부땐 안 간 수업이 간 수업보다 많다. 가봤자 지루해서 집중을 못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비싼 학비를 내고 공부하는 건데 주어진 교재를 모두 다 공부한다면 분명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뇌를 가졌기에 차선을 택해야했고, 그 결과가 내 인생에 준 선택지에 꽤 만족하는 편이다. 

 

4)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를 없애기 

수업시간에 잘 집중하지 못했다고 썼는데, 집중해서 성적을 잘 내고 싶을 때는 항상 교실이나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았다. 내가 이 글의 첫 문단에서 놀자고 쿡쿡 찌른 앞자리 여학생을 기억하는가? 앞에 다른 학생들이 있으면 그 수많은 애들 보느라 집중이 흐트러지기도 하고, 맨 앞에 앉으면 앞에 아무 방해물도 없을 뿐더러 선생님 바로 앞자리이기 때문에 집중을 정말 잘 했었다. 같은 이유로 집에서보단 독서실, 도서관에서 훨씬 집중해서 공부를 잘 했었다. 2021년에 이 글을 쓰면서 당연히 스마트폰이 집중력의 공공의 적일 수 밖에 없는데, 스마트폰도 50분간 비행기모드로 해놓고 10분만 체크하거나 하는 방법을 쓰면 도움이 된다.


여기까지가 내가 약물 치료 없이 공부를 하기 위해 했던 노력들이었다. 그러나, 위에 ADHD가 약물치료 없이 열심히 몰두하려면 부작용이 생긴다고 썼는데, 그 부작용은 바로 건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ADHD의 증상중에는 초집중이라는 상태가 있는데, 이 초집중에 들어갈 때는 먹는것도 자는 것도 잊고 일에 몰두하기 쉽다. 공부는 학교만 졸업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21세기 급변하는 세상에서 평생 해야하는 일인데, 먹는것도 자는것도 희생하면 공부할 수 있는 체력과 인지 자원도 악영향을 받는다. 나같은 경우엔 약물치료 받기 전에는 밤새워 먹지 않고 공부하는게 너무 힘들어서 번아웃도 오고, '열심히 사는 것'에 대한 회의감에 우울증과 불안증도 있었다. 약물치료를 받기 시작한 후로 공부와 먹고 자는 것에 대한 균형을 이루기가 훨씬 쉬워졌기 때문에, 부작용이 있지 않는 한 약물 치료를 가장 먼저 추천한다.

 

그리고 나는 학창시절에 ADHD인줄 몰랐기 때문에 받지 못했던 것인데, 본인이 현재 학생이고 ADHD를 가지고 있다면 가장 추천하는 마지막 방법이 있다. 

 

5) 주변의 도움을 받기

안다. 대한민국처럼 상대평가인 사회에서는 모두가 타인의 실패를 바란다는 것. 그 뿐인가, 공교육에서 학습 장애에 대한 인지도가 낮기 때문에 미국에서처럼 시험 시간을 늘려준다던가 하는 도움은 현실적으로 받을 수도 없다. 그러나 내가 가진 환경 내에서, 최대한 도움을 요청하고, 받고, 나 또한 도움을 주면서 살아가야한다. 내가 ADHD를 비롯한 여러가지 다른 학습 장애를 가지고도 대학원까지 졸업할 수 있던 이유는, 바로 나를 믿고 도와준 사람들 덕분이다. 학창시절 내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신 부모님. 내가 과제를 해가지 않았을 때 방과후 따로 앉혀놓고 따끔한 경고를 주거나 재시험을 보게했던 고등학교 선생님들. 내가 ADHD, 우울증과 인턴십 때문에 학교에 가지 않았을 때 강의실에서 배운 내용을 요약해서 정리해줬던 학우들. 그리고 서로 정신 건강에 어려움이 있을 때 마다 돌아가며 서로의 휴식을 장려하고, 건강한 사람이 더 많은 일을 맡아서 했던 대학원 논문 공동저자까지. 내 주변에 믿을만한 네트워크를 구축해두고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면, 따로 살 때 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실현하며 살 수 있다. 

 

장애인은 영어로 disabled 이다. 수동태로 '가능성이 제한된 사람들'로 의역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장애는 우리의 본질적인 불가능이 아니라, 사회 구조로 인해 가능성이 제한된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disabled의 반댓말은 able (가능한)이 아닌 enabled (가능케한)이다"라는 말을 정말 좋아한다. ADHD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는 어찌 됐든 발달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럼 어떤가. 나를 가능케하는 것들을 찾아서 내 인생에 심으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ADHD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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