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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라이프

독일에서 엑스트라 알바하기

by 벨리너린 2020.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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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2017년 연말, 평창 올림픽을 몇개월 남짓 남겨두고 있을 때였다. 나는 베를린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뉴비였고, 그런 나를 어여삐 여긴 프랑스 친구 P가 UdK (베를린 미술대학) 학생들이 주관하는 행위 예술과 설치 예술 이벤트에 데려갔었다. 당시 과제에 치여 살던 시기라 과제 하다가 정말 대충 맨투맨 티셔츠와 통이 큰 청바지를 입고 전시에 갔었다. 

 

전시에서 친구들과 이야기 하던 도중, 한 친구가 껌을 모두에게 돌렸다. 그러던 중 우리 근처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자기도 껌을 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고 우리 대화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그가 나보고 자기가 캐스팅 디렉터인데 ZDF (독일 공영 방송사)에서 평창 올림픽 티저 영상에 출연할 한국인 모델을 찾고있다고, 혹시 관심 있냐고 물어봤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이상하고 웃긴 제안이라 진지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나는 웃으면서도 "옷을 벗는다던가 살을 빼는 일은 절대 없을거예요"라고 말했다. 그가 절대 그런 일이 아니라고, 관심 있다면 그가 당장 여기서 프로필 사진을 찍고 신체 사이즈를 적어갈 수 있다고 했다. 이미 속해있는 에이전시나 예전에 출연한 광고가 있는지도 물어봤다. 좀 이상한거 아닌가 하는 기분이 여전히 들었지만 함께 있던 프랑스인 친구 P는 이미 에이전시에 등록되어 활동하는 패션 모델이라, 내게 괜찮은것 같다고 해줬다. 꾸미지도 못하고 너무 대충 나온 터라 사진 찍힌다는 것 자체가 좀 창피했지만 설사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정면 측면 사진 몇장 찍힌다고 설마 피해 볼 일이 있을까, 싶어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도록 허락해줬다. 신체 사이즈는 키와 몸무게, 신발 사이즈만 말해주고 그 외 좀 더 민감한 정보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괜찮다고 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친구 D는 자기 생각엔 동양인 여자에게 관심있는 사기꾼이 아닐까 했다고 하고, 나도 그러지 않을까 미심쩍었다. 

 

그렇게 재밌는 경험을 했다, 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날 캐스팅 에이전시에서 오디션을 보러 올 수 있냐고 전화가 왔다. 에이전시를 구글링 해보니 실제 길거리 캐스팅 전문 에이전시였고, 알고보니 홈페이지에 우리 대학원 선배 프로필도 있어서 신뢰가 가서 오디션을 보겠다고 했다. 무조건 키가 크고 엄청 마른 모델을 다루는 패션 모델 에이전시가 아니라 광고에 출연하는 호감형이나 개성있는 외모의 다양한 연령대의 일반인 모델 전문 에이전시인것 같았다. ZDF 관계자들에 의해 오디션 1차 합격까지 했지만 최종 선택되지는 않았고, 에이전시는 또 다른 캐스팅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해서 계약서도 작성했다. 그 후 다른 오디션 제안이 한 두번 있었고 두어번 다른 오디션에 가봤지만 최종 선택은 되지 않았었다. 

 

그렇게 3년이 흘렀고, 에이전시가 광고 촬영에 엑스트라가 필요한데 촬영일에 시간 되냐고 물어봤고, 막 대학원을 졸업하고 할일이 별로 없던 나는 흔쾌히 시간이 된다고 했다. 감독의 승인으로 나는 광고 엑스트라로 캐스팅 됐고, 바로 어제 첫 촬영에 다녀왔다. 에이전시와 계약하고 3년만에 일거리를 물어다준 셈이다. 

 

촬영 전, 다른 배우나 모델로 활동하던 친구들이 엑스트라로 촬영갔던 이야기를 해줬는데 모두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 런던에서 할리우드 배우들과 Bar 장면을 촬영할때 바텐더 역할을 맡았던 친구는 진짜 거짓말 안하고 10시간동안 잔을 닦고 바를 닦는 연기를 반복하고, 배우들의 무례함을 견디는게 힘들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엑스트라 후기를 읽어봤을 때도 먹을것도 차별해서 받고 춥고 대기할 곳도 마땅치 않은 열악한 환경에서 인간 이하의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좀 단단한 마음의 각오를 하고 갔었다. 

7-80년대 구동독 스타일의 세트 열차 내부

그런데 웬걸, 결론부터 말하자면 굉장히 괜찮고 신선했던 알바 경험이었다. 물론 최저시급으로 계산되어서 10시간 일하기로 합의해서 돈을 그렇게 많이 벌수 있는건 아니지만 내가 했던 최저시급 아르바이트 중 가장 몸과 마음이 편안했고 거의 아무런 노력도 안했던 것 같다. 

 

오전 7시까지 집합명령을 받았고 새벽 5시에 나를 깨워서 가는 부분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아직 어두컴컴한 촬영 현장에 도착하니 스태프들은 나보다 훨씬 먼저 도착해서 장비를 셋업하고 있었고, 촬영 현장에서 일하는 전원이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코로나 항원 테스트를 받아야했다. 일찍 도착해서 의료차량에서 검사를 받았고, 검사 30분 내로 음성 결과가 나와서 세트장에 투입됐다. 

 

독일 엑스트라 촬영 의상
독일 엑스트라 촬영 의상

 

엑스트라이고 이미 어떤 의상을 입고 와야 하는지 지시를 받은 터라 따로 의상은 안줄줄 알았는데, 세트로 가니 스타일리스트가 70-80년대 동독 스타일로 옷을 갈아입혀줬다. 영상 3도 쯤의 추운 날씨였는데, 스태프가 친절히 열차 세트 안에 난방을 틀어놨으니 거기로 들어가서 대기하라고 했다. 열차 세트 대기 공간 안은 내 베를린 아파트 방보다 따뜻하게 난방이 되어 있었다. 한 4-5시간동안 대기하며 따뜻한 곳에서 SNS도 하고 브런치 글도 읽고 하다보니 드디어 나도 촬영에 들어갔다. 한 15분 열차 승객 역할로 촬영을 하고 나니 잠깐 쉬면서 따뜻한 수프와 커리가 준비되어 있으니 밥을 먹고 오라고 했다. 다양한 과자와 수프, 빵, 오픈 샌드위치가 모든 스탭과 배우, 엑스트라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고 생각했던 것 보다 성의있는 구성이어서 나는 꽤나 감동했다. 혹시 밥을 제대로 안줄까 싶어서 과일 등의 간식을 챙겨갔는데 촬영 현장에서 워낙 밥을 잘 줘서 내가 챙겨온 간식을 먹지도 않았다. (아, 물론 밥을 잘 준다함의 기준은 독일 기준.) 화장실도 뮤직 페스티벌에서 볼수 있는 열악한 이동식 화장실이 아니라 비행기 화장실 퀄리티 + 그것보다 좀 더 넓은 화장실이라서 불편함이 없었다.

 

코로나 안전 수칙도 굉장히 잘 지켜져서 놀랐다. 촬영장에 있는 사람이 전원 음성 결과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대기할때는 물론이고 촬영중에도 마스크를 썼고, 면마스크만 가져 온 사람들에게는 성능 높은 마스크도 따로 나눠줬다. 70-80년대 시대 설정이 있는 극이다 보니 촬영중 엑스트라들은 마스크를 쓰고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는 설정까지 해서 참 좋았다. 

 

다른 엑스트라들 중에서 나와 비슷한 경로로 캐스팅 된 사람이 많은 것 같아 보였다. 그 중엔 키가 크고 마른 전형적인 패션모델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연령과 인종도 다양했고 국적도 다양했다. 엑스트라 일을 많이 해본 사람들은 작은 연기가 필요한 일도 하도록 요청받았고, 대기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바느질 거리를 가져온 사람도 있었다. (나도 책을 3권 가져갔는데 의상 갈아입을때 의상실에 가방을 두고 나와서 스마트폰만 했다.) 

 

10시간 촬영이 예정이었으나 생각보다 빨리 빨리 진행되어 우리는 1시간 일찍 집에 갔다. (시급은 예정된대로 10시간 기준으로 쳐준다.) 꽤나 편안한 경험이었으나 칼퇴근은 정말 즐거웠다. 스탭들과 프로듀서 모두 정말로 친절하게 엑스트라들의 편의를 배려해줬고, 나도 코로나 시대에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일상에 색다른 하루를 보내게 되어 즐거웠다. 다른 엑스트라 분들도 함께 일하기 즐겁고 친절한 분들이었고, 내가 독어로된 지시를 완벽히 알아듣지 못하면 영어로 통역도 해주고 설명도 잘 해주셨었다. 모든 촬영장이 이렇지는 않겠지만, 앞으로도 종종 몇번 해볼만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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