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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라이프

코로나19 시대의 독일 살이

by 벨리너린 2020.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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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이제는 백신이 상용화되기 시작한다는 뉴스가 들리고 어쩌면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의 끝에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전세계인의 2020년을 통째로 뒤흔든 코로나 한 가운데서 내 베를린에서의 삶을 뒤돌아 본다. 

 

HKW. 록다운때 슈프레 강가 산책만 주구장창 했었다.

1월 

 

한국에서 새해를 보내고 1월 중순에 베를린에 왔다. 아직은 코로나가 전세계를 집어 삼킬 줄은 아무도 모르던 때였지만, 우한에서 이미 신종 폐렴 문제가 심각하다는 뉴스를 듣고 인천 공항에서 혹시 노출되는 것 아닐까 아주 살짝 걱정은 했었다. 독일 바이에른 주에서도 중국인 출장자와 접촉한 사람 4명 정도가 확진 되었었던것 같다. 이 때부터 이미 유럽에 아시아인에 대한 코로나 바이러스 인종차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1월 말, 베를린에서 열린 지속가능성 패널 토론 강연에 갔었는데 강연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데 어떤 백인 중년 여성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표정이 확 공격적으로 변하며 자기 입과 코를 스카프로 가렸다. 정말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나는 경험이었다. (아니 손 씻는 것 만한 공중 위생 모범 행동이 어디에 있다고!)

 

2월 

 

이미 한국에서는 신천지 사태로 난리가 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에 비해 독일은 너무나도 안온했다. 대학원은 대면 수업으로 개학했고, 학교는 온라인 수업 변경 계획은 없다는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우리 학교는 우한 봉쇄 때문에 우한에 갇혀 돌아오지 못한 대학원 후배에 대한 어떠한 배려 조치도 주지 않아 결국 동기들이 직접 수업중에 핸드폰으로 그 후배에게 수업 생중계를 해줬고 그 후배가 채팅으로 뭔가를 물어보면 대신 교수에게 질문해줬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라고 할지언정 독일인들의 무의식 중에는 전염병은 아시아나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고 독일 같은 선진국에게 닥칠 문제가 아니라는 안일함이 있었던 것 같고, 그게 좀 화가 났었다. 대중교통 탈 때마다 사람들이 내가 아시아인이라서 공격할까봐 두려웠다. 

 

3월 

 

유럽 전역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급진적으로 많아지며 난리가 나기 시작했고,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베를린은 그 당시 그렇게 심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계속 확진자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난 개인적으로 3월 초가 제일 힘들었는데, 내가 논문 파트너에게 이제 연구소에서 대면으로 만나는 것은 최대한 줄이고 재택으로 하자고 했는데 세상 쓸데없이 예민한애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스크도 쓰고 다니고 싶었는데 이미 대중교통에서 마스크를 쓴 아시아인들에 대한 따가운 눈초리, 더 나아가서는 공격이 유럽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 혼자만 마스크를 쓰기가 무서웠다. 파티와 대규모 모임은 계속 되었다. 이미 베를린에서 확진자가 나고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교는 여전히 강경하게 대면 수업을 진행해나가고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할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때 쯤 너무 화가 나서 총장에게 항의 이메일을 쓰고 있던 찰나 베를린 시의회가 모든 학교의 대면 수업 중지를 명령했고, 우리 학교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결국 몇 분 뒤 총장에게 이번주 수업은 다 캔슬하고 다음주부터 온라인 수업에 들어간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리고 베를린은 록다운에 들어갔다. 

 

나는 록다운에 들어가자마자 많이 아팠다. 코로나와 비슷한 증세로 발열, 마른기침이 계속되었고 룸메이트는 비슷한 증세에 더해 호흡곤란까지 왔었다. 나는 한달이 넘게 이런 증세로 아팠고, 당시 독일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으려면 확진자와 분명한 접촉이 있거나 2주내 위험지역 방문 기록이 있었어야 해서 보건소에 전화해도 검사를 해주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화장지와 파스타가, 그리고 그 외 면역력에 필요한 생강, 레몬 등이 모두 매진되고 인터넷에서 아주 비싼 값에 팔리고 있었다. 나는 18일 동안 집 현관 밖으로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우리 세대가 겪는 첫 전세계적 재난 상황이었다. 

 

4월 

 

록다운이 지속되었고, 나는 석사 졸업 논문을 제출해야 하는데 여전히 몸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앙겔라 메르켈이 2차대전 이후 독일이 겪은 가장 심각한 재난이라고 연설하니 심각성이 확 와닿았다. 그 후 분단 국가로 냉전도 겪어낸 나라인데 말이다. 그 와중에 정말 서럽고 화가 났던 부분은 이번 총선 재외 국민 투표가 눈 앞에서 갑자기 취소된 것이었다. 성인이 된 직후 계속 유럽에 살아왔고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서의 투표를 통한 발언권이 없다는 사실이 계속 불편했었고, 그 때문에 한국에서의 투표권이라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아픈 와중에 며칠밤을 누구를 뽑을지 고민하며 리서치 하던 와중 갑자기 내가 투표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아서 충격적이고 화가 났다. 내 소중한 기본권이 누군가에게는 행정상의 불편을 이유로 갑자기 너무나 쉽게 앗아갈 수 있는 가벼운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게 너무 적고 내 목소리는 너무 작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누군가에겐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지만 나는 룸메이트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 사는 교민들이 대거 한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한국에서 자가격리 수칙을 지키지 않고 돌아다니는 귀국 유학생들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었다. 언론사 뉴스 댓글에는 유학생들을 싸잡아서 조롱하는 내용도 많았다. 또한 이탈리아, 이란 등 심각한 상황에 처한 국가들에서 국가가 비행기로 교민들을 데려오고 있었고, 교민이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아 감동받는 사람도 많았지만 이 역시 나라 버리고 떠난 사람에게 나랏돈 쓴다며 비난하는 여론도 많았다. 한국에 계신 나의 부모님도 당시에 나를 정말 많이 걱정하시고 돌아올 준비를 하는게 어떻겠냐는 말도 오갔지만, 나는 졸업 논문과 취업, 비자, 언제 독일로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다는 불확실성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숙소를 빌려서 자가격리할 여력도 없을 것 같았고 가족 중 자영업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족 전체가 자가격리를 한다면 당장 수입이 끊겨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질 상황이었다. 당시 우리 집엔 내가 지내면서 논문을 쓸 방도 따로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관위는 "귀국하시면 투표할 수 있다"는 소리를 해서 내 마음을 더 다치게 했다. 한국에서도 유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이 때 여러가지 스트레스의 축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최고조가 됐었던것 같다.)

 

5월

 

석사 논문 막바지에 열중하느라 사실 베를린의 록다운이 해제된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4월에 미디어를 통한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어서 정신 건강을 위해 미디어를 최대한 접하지 않았다. 실제로 신체적 건강도 정신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 5월 말, 드디어 석사 논문을 제출했고 제출과 함께 내 모든 스트레스와 고통이 씻은듯이 사라졌다. (역시 논문은 만병의 근원인가...?) 석사 논문 제출한 날에 남자친구와 함께 테이크아웃을 할 요량으로 한식당에 가고 나서야 이제 식당에 앉아서 밥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화장지도 다시 수퍼마켓에 돌아왔다.

 

록다운 해제 후, 여름의 바르샤우어 슈트라쎄

6월 - 9월 

 

사람들은 이제 코로나가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듯 보였다. 내 친구들 중 다른 나라로 여름 휴가를 안 다녀온 사람이 없었다. 날씨가 따뜻하니 사람들이 야외에서 정말 많이 모였다. 사람들은 야외에서는 물론이고 실내에서도 하우스파티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베를린에 다시 록다운이 돌아올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듯 보였다. 나는 날씨가 추워지면 다시 록다운이 돌아올것이라고는 생각 했지만 록다운이 돌아오면 식당에서 밥도 못먹고 친구들도 다시 못만나겠지... 싶어서 친구들과 야외 식당에서 밥은 열심히 먹었다. 혹자는 이런 나의 행동 역시 무책임하고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느끼겠지. 거기에 대해 변명할 수도 없다. 

 

코로나 시대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마 우리의 사회적 관습을 통째로 뒤바꾸어 놓은 사태에서, 어느정도 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있던 '도덕'의 기준이 갑자기 모두에게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봄에는 마스크도 안쓰고 공원에서 모인 사람들에게 정말 화가 났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가면서 아무도 내 도덕적 기준에 맞게 행동하지 않는데 나만 화를 내는 것에도 많이 지쳤었다. 그래서 내 행동도 약간 더 느슨하게 수정했고, 친구들과 밥을 먹으면서 행복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내가 이래도 되나?'하는 질문이 내 양심을 긁었다. 이 모두 다른 도덕적 기준들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하는데에 많은 괴리감을 느꼈다. (물론 과학적으로 봤을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분명한 답이 있었다.)

 

10월

 

베를린에도 확진자 폭탄이 터졌다. 노이쾰른 지역에서 실내에서 200명 규모의 결혼식을 했는데, 신부 친구로 참석한 사람이 한국에서 신천지 확진자처럼 수퍼 스프레더가 되었다. 그렇지만 수퍼 스프레더 한명을 비난하고 싶지 않은게, 애초에 결혼식이 열리지 않고 200명의 사람이 참석하지 않고 베를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코로나가 존재하지 않는듯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확진자 폭탄이 터지진 않았을 것이다. 확진자도 환자에 불과하고 '너 때문에'라는 비난은 피해야한다. 이제 베를린은 독일 내에서도 꽤 심각한 수준으로 위험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내 친구들 중에서도 직접 접촉은 없었지만 확진자가 2명이 나왔고, 그들과 접촉했던 친구들 모두 자가격리하고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바톤 터치 릴레이 경주를 하듯 주위에서 확진자 접촉 때문에 자가격리를 하고 검사받고 해제하는 상황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졸업 후 취업이 계속 되지 않아 먼저 같은 업계에 취업한 대학원 선배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자기가 졸업했을땐 주니어 포지션이 많았는데 요즘엔 코로나 때문에 채용 동결에 들어간 베를린 스타트업들이 많고, 채용을 하더라도 비용이 적은 인턴이나 아니면 경력이 검증된 시니어를 뽑는다고 했다. 물론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정말 취업하기에 쉽지 않은 시기라는 것을 직감했다.

 

11월 

 

베를린 상황이 정말 심각하게 나빠졌다. 2차 대유행이 1차 대유행보다 훨씬 심각할것이라고 이미 봄에 예견했던 전문가들의 말은 전부다 사실로 돌아왔다. 역시 전문가 말을 믿어야한다. 베를린에도 봄보다는 좀 약식 형태의 일명 '록다운 라이트'가 시작되었다. 재택근무는 권고 사항이었고, 봄에 맞벌이 부모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었기에 (그리고 그 피해는 거의 모두 엄마들이 겪었기에) 어린이집과 초등학교는 대면 수업을 그대로 진행했다. 나는 봄과 같이 정말 아팠고, 이런 상황에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진행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판단해서 확진자 접촉이 없었음에도 검사를 받으러 갔다. 가정의학과에서 공보험으로 무료로 검사를 받았는데 (유증상자는 무료이다) 검사 결과 나오기 까지 무려 7일이나 걸렸다. (검사 수가 폭발을 해서 검사 인력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나는 7일동안 집에서 혼자 자가격리를 했고, 남자친구가 장을 봐서 내 문앞에 놔주고 갔다. 다행히 음성 판정을 받았다. 

 

1차 대유행 시기에 다른 유럽 국가들은 코로나 때문에 중환자실이 꽉 차서 사람들이 다른 질병으로 죽어나가는 일이 많았는데, 독일은 인구당 중환자실이 넉넉한 편이었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2차 대유행 시기가 되고 독일 중환자실도 이제 코로나 환자로 차기 시작 하면서 의료계에 과부하 신호가 오고 있었다. 쓸데 없는 걱정일 수도 있지만 자전거 타다가 사고나면 충분히 살 수 있는 부상으로도 응급실에 가지 못하거나 수술 인력이 충분하지 않아 죽을까봐 자전거도 그만 타고 다녔다. (워낙 내가 자전거 사고를 낼 뻔한 적이 많기도 하고, 실제로 베를린 도시 인프라가 그렇게 자전거가 다니기 안전한 인프라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친구들 중에 베를린에서 자전거 사고 당해서 수술하고 회복하는데에 몇개월씩 걸린 애들도 꽤 있다.)

 

12월 현재

 

록다운은 내년 1월까지 연장되었다. 내가 독일이라는 나라에 수상이라는 직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죽 앙겔라 메르켈이 수상이었는데, 앙겔라 메르켈의 새로운 연설에서 난 그녀가 그렇게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것을 처음 봤다. 제발 글뤼바인 매대 앞에서 삼삼 오오 모여서 마스크도 안쓰고 사람들하고 대화하지 말아달라고. 크리스마스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방문할 사람이라면 제발 지금부터 자가격리를 해 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될 수 있다고. 

 

대부분의 친구들은 크리스마스에 집에 가는 것을 포기했고,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인 벌써부터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부모님이 고령자고 혼자 계신 친구들은 혼자 계신 부모를 방문하지 못하는 것도, 그렇다고 부모님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도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호주에 홀로 살고계신 고령의 어머니를 둔 친구는 "내가 집을 떠나서 살기로 결심했을땐 집이 이렇게나 먼 줄 몰랐어"라고 했다. 나 역시 유럽에 살기 시작한 이후 제일 우리 집이 멀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이제 백신이 순차적으로 상용화되기 시작한다는 뉴스가 들리면서 터널에 끝이 보이고, 어쩌면 몇개월만 더 기다리면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2021년에 삶이 얼마나 빨리 다시 궤도로 돌아갈지는 예측할 수 없다. 백신 상용화에 몇개월이 걸릴수도, 1년이 걸릴 수도 있다. 항공업계, 예술업계, 자영업자들이 겪은 쇼크는 코로나가 종식된 이후에도 쉽게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 

 

코로나가 시작될 당시엔 '뉴노멀'의 시대가 열렸다고 환영한 사람도 있었다. 재택 근무, 탄소 배출량 감소 등. 나도 1년 동안 새로운 미래가 어떻게 코로나 이전보다 나아져야 할지 사회가 고민할 기회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1년을 돌아보니 새로운 미래의 청사진은 커녕 지금 당장 살아남는데에도 힘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우리 사회는 코로나 이후의 미래도 준비 없이 오는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같다.

 

그러나 1년동안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고했다. 수고했어요 정말. 이 재난의 끝에서 웃으면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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