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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건강 이야기/ADHD 생활기

워라밸을 지키는 재택근무 하루 루틴

by 벨리너린 2021.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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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을 하고 재택근무를 시작한지 한달 하고도 일주일이 넘었다. 때마침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시작할 때 코로나가 터진건 정말 힘들었지만, 또 막상 취직하고 나니 ADHD인인 내게 취직할 시기에 맞춰 재택근무가 일반화 된 것은 정말 기쁘기 그지 없는 일이다. ADHD 약물치료를 시작하기 전에는 나와 직장생활은 상극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장 생활의 힘든 점의 8할은 바로 출퇴근이었다. 맨날 늦게 일어나서 허둥지둥 씻고 젖은 머리로 출근하는 것도 힘들었고, 건강하게 먹고싶으면 매일 도시락을 싸야하거나 아니면 매일 밖에서 사먹어서 건강도 나빠지고 살도 찌는게 너무 싫었다. 하루 8시간 남들이 보는 곳에서 얌전히 앉아있어야 한다는 점도 엄청난 고역이었다. 

 

그러나 약물치료를 시작하고 재택근무를 시작하니 (그리고 정규직 월급을 받기 시작하고나니) 직장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엄청나게 달라졌다! 일단 출퇴근 시간이 없어지는 것만으로도 하루에 엄청난 시간이 세이브된다. 교통에 들어가는 시간 뿐만이 아니라 출근용 단장을 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하루에 서너시간은 족히 세이브된다. 재택근무 사전에 지각이란 없다! 그리고 업무 중 신나는 음악을 틀어놔도 되고, 회의 중 카메라 밑에서 피젯 토이를 사용하는 것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된다. 화상 회의중이 아니라면 내가 다리를 떨든, 의자에서 일어나 돌아다니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참가자수가 많고 내가 발언하지 않아도 되는 강의형의 화상회의라면 카메라와 마이크를 꺼두고 무선 헤드폰을 연결해서 간단한 집안일을 해도 된다. 나 같은 경우엔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 이 편이 내용에 집중이 더 잘 된다.) 점심도 집에서 건강하게 직접 해먹을 수 있고, 100% 내 취향대로 갖춰진 탕비실 (a.k.a 나의 부엌) 도 책상에서 세 걸음 떨어진 곳에 있다. 

그러나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 출퇴근 시간이 명확하지 않아지고 '조금만 더...'라는 생각에 오히려 하루 종일 일 생각을 하게 되는 불상사가 생길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시도해봤고 내게 잘 맞는 재택근무 루틴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이라면 모두 초등학교 때 동그라미 방학 계획표를 세워 놓고, 전혀 지키지 않은 추억이 있을 것이다. 자라나는 ADHD 꿈나무였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ADHD에 대한 병식이 시작되고 나서, 동그라미 계획표가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예전에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어서 하루에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징'이라고 생각하고 과부하가 와서 아무것도 못하곤 했다. 그러나 Owaves 앱으로 동그라미 계획표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나니 하루에 무얼 할 수 있고 없는지가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니 현실적인 루틴을 만들고 루틴대로 생활하기도 훨씬 쉬워졌다. 

Owaves 앱으로 만든 재택 근무 생활 계획표

아침 루틴:

  • 7시: 기상해 잠도 깨고, 양치도 하고, 시간이 되면 명상도 한다. 미리 만들어둔 아침 플레이리스트를 튼다. 
  • 7시30분: 레몬수와 방탄 커피를 만들어 마신다. 방탄 커피를 마시면서 아침 저널링을 하는데, 거창한 것은 없고 오늘 감사한 것 3가지와 오늘 하루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살 것인가 적는다. 
  • 8시: 홈트 운동을 한다. ADHD인이 운동하는 법 포스팅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매일 아침 새로운 운동 영상을 찾으려면 그것도 나름 인지자원이 많이 들어서 미리 요일별로 부위별 운동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둔다. 월요일은 상체, 수요일은 하체, 금요일은 코어, 화/목은 스트레칭, 주말엔 전신 운동 이런 식으로. 짧은 운동과 긴 운동 영상 옵션을 넣어놓고 긴운동 할 시간이나 체력이 없는 날엔 짦은 운동으로 하는 융통성을 허용한다. (어렵고 귀찮으면 안하게 되고, 안하는 것 보단 짧게라도 하는게 낫다는 생각.) 
  • 8시30분: 샤워하고, 머리 말리고, 시간이 남고 오늘 좀 중요한 미팅이 있다 싶으면 재택근무용 간소화된 화장도 한다. 

재탁 근무 루틴

  • 9시: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을 확인한다. 출근 할 때마다 한두문장 정도로 "출근 일지"를 적는데, 이게 일종의 출근 의식이다. 재택근무를 할 때는 뇌에게 '자, 이제부터 일한다'라고 의식적으로 전환해주는게 중요한 것 같다. 출근 일지 역시 별거 없고, 오늘 제일 중요한 일과 좀 더 잘하고 싶은 부분 같은 것을 적어두며 마인드 셋팅을 해둔다. 아침을 방탄커피로 때우면 오전 근무 시간동안 허기질 때도 있는데 그럴 땐 견과류나 베리류를 주워 먹는다.
  • 12시: 즐거운 점심시간! 점심은 보통 간단하게 조리가 필요없거나 전날 저녁에 만들어두고 남은 음식을 먹는다. 이 때 점심 먹으면서 유튜브를 보는 등의 휴식을 취한다. (쉽고 빠른 자취 요리는 여기.) 
  • 3시: 화상 회의가 없다면 의자에서 일어나 15분간 휴식을 취한다. 이 때 의자에서 일어나는게 중요하다. 식물에 물을 주던지,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던지, 아니면 빨래를 널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온다. 
  • 5시 30분: 출근할 때와 비슷하게 퇴근 일지를 적는다. 역시 생산성보다는 '자, 이제부턴 쉰다'라고 뇌에게 세뇌하는 과정이다. 재택근무는 사무실 출근과는 달리 공간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저녁 시간을 온전히 내 시간으로 보내려면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 느꼈던 점들, 걱정 거리는 퇴근일지에 털어버리자. (당연히 5시 반보다 늦게 퇴근하게 될 때도 있는데 그럴 땐 퇴근 일지에 퇴근 시간도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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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루틴

  • 5시 30분: 저녁 준비를 시작한다. 아침을 간단하게 방탄커피로 때우고 점심 역시 간단식이나 전날 남은 음식을 먹기 때문에, 저녁을 가장 공들여 차려먹는 편이다. 요즘엔 메뉴 선정하고 장보는 것도 귀찮아서 밀키트 배달 서비스인 HelloFresh 도 애용하는 편이다. 
  • 6시 30분: 일어나서 청소를 시작한다. 청소에 한시간 반이나 선정한게 너무 많아 보일수도 있지만, 사실 하루종일 앉아있다가 일어나서 움직이는 시간이 중요하기에 일부러 밥먹은 바로 다음을 청소 시간으로 정해놨다. 저녁 먹은것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리던지, 쓰레기를 버리던지, 화장실 청소를 하던지, 그날 그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청소 2-3가지를 한다. 재택근무를 할 때 저녁까지 일 생각하지 않는 정말 좋은 방법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팟캐스트 등을 들으면서 즐겁게 하는 편이다. (청소에 즐겁다는 수식어를 붙이다니 ADHD 약물치료 시작하고 정말 사람 됐다...) 
  • 8시 15분: 청소 후 15분 정도 시간을 남겨뒀는데 저녁에 좀 앉아서 멍도 때리고, 핸드폰도 할 시간을 일부러 비워놨다. 이 시간부터는 1시간 동안 의식적인 놀이를 한다. 예전 포스팅에서 언급한 도파민 메뉴에서 미리 골라둔 의식적인 휴식을 이 시간에 취하는 것이다. 그날 그날 기분과 체력에 따라서 덕질을 하기도 하고, 식물을 돌보기도 하고, 네일 아트 같은 걸 하기도 한다. 직장인의 정신건강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 하루에 내가 존재한다는 기분이고, 그렇기에 온전히 나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한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소중하다
  • 9시 30분: 수면 전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한다. 이 시간대에는 되도록이면 블루라이트가 없는 종이책을 선호한다.
  • 10시: 미리 만들어 둔 저녁 플레이리스트를 튼다. 씻고, 어느 정도 정리 정돈을 하고 본격적으로 잠들 준비를 한다. 이 때 핸드폰은 비행기 모드로 해 놓는다. 
  • 10시 30분: 잠을 청한다.

내가 매일 칼같이 이렇게 사는 것은 전혀 아니다. 루틴은 가이드라인 정도지, 절대적인 룰이 아니다. 흔히 ADHD는 루틴을 싫어하고 못지킨다고 알려져있고, 어느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매일 비슷한 시간의 틀을 잡아두고 그 틀 안에서 매일 자기 자신에게 자유를 주니 전혀 루틴이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매일 다른 점심 메뉴, 다른 운동, 다른 놀이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새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애플워치에서 보이는 Owaves

이전 애플 워치를 ADHD 보조 기기로 활용하는 법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적 있는데, 나는 사실 Owaves 앱을 사용하려는 목적이 애플 워치 구매 동기의 7할 쯤은 된다. 그리고 굉장히 효과적이다. ADHD 특유의 난제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전혀 감이 없다는 것인데, 일과가 바뀔 때 마다 손목에 진동을 보내주니 굉장히 일과를 지키기가 쉬워진다. 

 

팬데믹은 좋던 싫던 우리 삶에 큰 변화를 가지고 왔다. ADHD를 가진 나로서는 재택 근무는 정말 환영하는 변화이다. 독일 인구의 45%가 백신을 맞고 포스트 코로나를 논하는 요즘, 재택근무 만큼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우리 곁에 함께 했으면 좋겠다. 

 

당신만의 재택근무 워라밸 유지 비결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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