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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건강 이야기/ADHD 생활기

성인 ADHD 약물 치료 1년 후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by 벨리너린 2022.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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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은지 반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예전에 쓴 글들의 조회수는 꾸준히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접속하지 않은 동안 애드센스 연동에 오류가 생겨서 수익은 전혀 생기지 않고 있었다 ㅋㅋ 진작 접속해볼걸!) 많은 분들이 내 블로그에서 ADHD 관련 정보를 읽고 계시는 듯 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업데이트가 뜸했던 이유는 그동안 바쁘고 즐겁게 현생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창 블로깅을 활발하게 했던 때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구직을 하고 있던 백수 신분이었기 때문인데, 작년 초여름에 독일 대기업에 취직하게 되어 재미난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시작하고 적응해나가면서 블로그에 대해서는 점점 잊어가던 터였다. 

 

ADHD를 진단받고 약물치료를 시작한지 1년이 약간 넘어간다. 성인이 되어서 약물치료를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는데, 약물치료 효과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내 경험이 궁금하신 분들도 계실 것 같아서 치료를 시작한 이후 내 인생이 어떻게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달라졌는지 기록해보고자 한다. 

 

참고로 나는 요즘 메디키넷 15mg-20mg을 하루 2회, 주 5일 복용하고 있다. 

 

1.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내가 ADHD 약물 치료를 가장 받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내가 가장 큰 변화를 느낀 부분이기도 하다. 예전 포스팅에서도 얼마나 ADHD가 주의력 뿐만이 아니라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지 써 놓았는데, 특히 성인 ADHD 환자라면 아동과는 달리 본인의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해야하기 때문에, ADHD 증상 때문에 의식주가 무너지게 되면 건강이 훨씬 직접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규칙적으로 먹고, 자고, 운동해야한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는가. 그리고 영양가있는 음식을 스스로 해먹어야한다는 것 누가 모르는가. 그러나 ADHD 증상이 심할 때는 규칙적인 생활과 계획잡힌 식습관이 정말 어렵다. ADHD 약물치료를 시작하고 죽기보다 어렵던 규칙적인 생활 습관이 잡히면서 이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 운동하고, 규칙적인 시간에 영양가있는 밥을 해 먹고, 적당한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게 예전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또한 충동성도 줄어들고 자제력도 늘어나면서 배부른데도 멈추지 못하고 꾸역꾸역 다 먹어치운다던가 한밤중에 갑자기 어떤 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서 야식을 배달시킨다던가 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낮시간에 각성제의 도움으로 제대로 깨어있으면서 밤에 제 시간에 잠 드는 것도 더 수월해졌다. 이렇게 생활 습관이 좋아지니 체력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음은 물론이고 정신 건강까지 덩달아 좋아졌다.

2. 취직을 했다. 

ADHD 약물치료를 하지 않았어도 취직은 하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약물치료 전에는 취업준비 활동이 정말 고역이어서 사실 이력서를 그렇게 많이 보내지도 않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장생활을 하는 내 미래가 전혀 기대되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서 집중해서 업무를 끝내는게 감옥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약물치료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빨리 은퇴하고 FIRE족으로 사는 꿈을 꿨고, 일하는 건 노예처럼 사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약물치료를 시작하고나니 직장 생활이 만족스러움을 넘어서서 즐겁게까지 느껴지고, 건강이 허락한다면 평생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내가 이번에 취직한 직장의 근무 조건과 환경이 좋아서 긍정적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예전같으면 감옥처럼 느껴졌을 9-5 규칙적인 생활이 오히려 생활의 틀을 만들어줘서 고맙게까지 느껴진다. 일하면서 내 능력을 발전시키고 인정받는데서 성취감을 느끼고, 동료들과의 유대관계에서도 행복을 느낀다. 집중해서 업무를 끝내는 빈도가 훨씬 늘어나니 항상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불안감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예전엔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이젠 월요일이 두렵지 않고 일 할 수 있어 진심으로 행복하고 감사하다. 

 

3. 돈을 덜 충동적으로 쓰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지금도 쓰기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백수로 1년간 살면서 마이너스 통장에 정말 깊은 빚을 졌다. ADHD 특유의 충동성 때문에 돈이 줄줄 새어나가기도 했고, 또 ADHD때문에 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돈도 많이 썼다. 취직하면 그까짓 빚이야 금방 갚게 될 줄 알았는데, 별 생각 없이 살다 보니 버는만큼 쓰게 되고 아무리 (사회 초년생치고) 많이 벌어도 저절로 모이는 돈은 없다는 것도 깨닿게 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하루에 써도 되는 일급과 일주일에 써도 되는 주급을 정해놓고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사실 예전부터 돈을 모으려면 가계부를 써야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절대로 가계부를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약물치료로 어느정도 예전보다 나아진 뇌 기능을 갖게 되니 생각보다 가계부 쓰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가계부를 쓰면서 돈의 가치를 좀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니 절약하는게 어렵지도 않고 오히려 돈을 막 쓸 때보다 불안하지도 않고 오히려 적은 돈으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으니 경제적 자유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여기서 포인트는, 약물치료를 시작한다고 해서 저절로 돈을 덜 쓰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의 노력이 분명히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비유는 안경을 쓴다고 해서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는건 아니지만 글을 읽으려면 안경이 필요하다라는 비유인데, ADHD 약물 치료를 한다고 해서 저절로 인생이 정리되고 좋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 모든 것들을 할 수 있게 되려면 (적어도 내게는) 약물치료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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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집이 (예전보다) 깨끗해졌다. 

ADHD 치료를 시작하기 전 내 집은 정말 폭탄맞은 상태였다. 게다가 체력까지 너무 안좋았으니 방을 치우고 나면 다른 곳을 청소할 체력과 집행 능력이 남아있지 않았고, 다음날 부엌을 치우고 다면 다시 방이 어질러져있는 식이었다. 집안일은 정말 시지포스의 형벌처럼 느껴졌고 하루에 집안일에 대해 느끼는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다. 약물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는 집안일을 하는 것은 이차방정식을 암산으로 하는 정도의 인지적 챌린지로 느껴졌다

 

그러나 약물치료를 시작한지 1년이 지난 결과, 매일 매일 정리하는 습관이 차곡차곡 쌓이다보니 이제 뇌속에 집안일에 대한 체계가 생겼는지 각성제를 복용하지 않는 날에도 별 생각 없이 정리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침대에 누워서 "으으 정리해야하는데"하면서 스트레스 받고 일어나지 못하는 일이 훨씬 적어졌고, 자기 전에 부엌 정리를 하지 않는 일은 마치 양치질을 안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 말은 즉슨, 예전에는 정리하는 습관이 몸에 배게 하는 것 조차 불가능했었는데 약물치료의 도움으로 습관이 몸에 배게 함으로서 약을 먹지 않는 날에도 정리하는 것이 쉬워진 것이다. 아직도 집안일을 엄청나게 잘하는건 아니지만 예전엔 이차방정식을 암산으로 하는 정도의 인지적 어려움으로 느껴졌다면 이제 두자리수 덧셈 뺄셈 정도의 인지적 문제로 느껴진다. 그래서 집의 디폴트 상태가 항상 그렇게 나쁘지 않은 상태가 되었고, 그러다보니 집안일이 그렇게 큰 산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내가 하루 종일 생활하는 환경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그렇게까지 받지 않으니 정신 건강에 정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5. 나와의 관계가 좋아지고 자존감이 높아졌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나 자신과의 관계이다. ADHD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는 자존감이 높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나도 열심히 취준 활동을 해서 취직을 하고 싶고, 청소를 해서 깨끗한 환경을 갖고 싶고, 알뜰하게 살아서 돈을 모으고 싶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올바른 식습관으로 건강하게 살고 싶은데, 이 모든게 버거우니 자기 효능감도 낮고, 또 '해야 하는데' 생각만 하면서 실천은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자기 신뢰감도 낮았다. 그러나 이 모든 부분이 향상되니 나 자신을 더 믿고, 긍정적인 자아상이 생기면서 나 자신과의 관계가 더 좋아지게 되었다.

 

물론 약물치료만으로 저절로 생긴 성과는 아니다. 취직하고 나서 미팅에 2-3분 지각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불안감이 들면서 상담치료도 몇달간 병행했는데, 상담치료를 하고 나서 약물치료를 시작하고도 남아있는 내 증상 역시 나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게 훨씬 더 수월해졌다. 내가 ADHD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남들보다 '나쁜 직원' 같고, 언젠가는 발각될 일처럼 불안하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누구나 다 장단점이 있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란 남들이 내 단점과 살아가듯이 나도 남들의 단점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고, 이제 어느정도 직장에서 내 능력을 증명했으니 누군가 내가 ADHD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도 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실제로 가장 가까운 동료 2명은 이미 내가 ADHD 진단을 받고 약물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약물치료를 하던 하지 않던 여전히 ADHD를 가진 사람이다. 이제는 내 증상을 관리하려고 하지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아직도 가끔 업무에 집중을 못하고, 하루종일 정신없는 날도 있지만, 이제는 그 사실에 절망하기 보단 '뭐 이런 날도 있는거지~' 하고 넘기기 수월해졌다. 그러나 이 수월함은 인생의 다른 부분이 약물치료 덕분에 훨씬 수월해지니 가능해진 마인드가 아닌가 싶다. 

 

 

6. 예전보다 더 행복해졌다. 

예전에는 산다는게 시지포스의 형벌처럼 느껴졌다. 매일 또다시 나를 먹이고, 재우고, 청소하고, 일해서 돈벌고, 운동시켜야 삶이 굴러간다니. 정말 버거웠다. 내가 원하는 삶에 조금이라도 근접하려면 내 가슴까지 올라오는 강물을 역행해서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약물치료를 시작하고 나니 이 모든 반복되는 일상의 일들이 식물에 물을 주는 즐거움처럼 느껴진다. 강물을 역행하는게 아니라 이제는 자동화된 생활습관 덕분에 별 애씀 없이 강의 흐름에 몸을 맡겨도 스스로 인생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느낌이다. 나와의 관계가 좋아지니 더 삶의 행복도가 높아졌고, 또 체력도 좋아지고 자기 효능감도 높아지니 삶에 더 많은 도전을 할 용기가 생긴다. 

 


ADHD 약물 치료를 하면 인생이 저절로 이렇게 변한다는 약장수같은 말을 하려는게 아니다. 하지만 달리기를 잘하려면 밥을 든든히 먹어야 하듯이, 인생을 원하는 방향에 이르게 하려면 충분한 각성 레벨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약물 치료에 반응하는 정도는 다르지만 ADHD는 약물 치료 예후가 가장 좋은 정신건강의학 진단명이기도 하다. 별다른 부작용을 느끼지 않고 있다면, 적어도 이 글이 약물 치료에 대한 거부감을 낮추는데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ADHD 약물 치료는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내 인생의 가능성을 열어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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