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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라이프

코로나 시대, 베를린의 12월

by 벨리너린 2020.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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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벨뷰 대통령궁의 크리스마스 트리

나는 유럽에서의 7년간의 유학생활동안 사실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내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일단 12월이면 항상 기말고사에 찌들어서 절반은 반죽음 상태로 보내기 일쑤였고, 나머지 절반은 한국으로 그렇게 찌든 몸을 이끌고 한국으로 도망가서 가족들과 함께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보내거나 (오빠는 겨울이면 본가 소파에서 누워 엄마가 해준 음식을 집어먹는 나를 보고 '한국에 요양왔냐'라고 표현하곤 했다) 한국으로 가기 여의치 않은 때면 노르웨이던 라트비아던 친구네 가족 크리스마스에 얹혀가곤 했다. 가뜩이나 어두컴컴하고 추운 베를린의 크리스마스에 모두가 자기 집으로 떠난 텅빈 도시를 혼자서 지킬 용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엄청나게 자신을 푸쉬하다가 어디론가 떠나서 타인이 만들어준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의지해 확 늘어지는게 나의 12월의 패턴이었는데, 올해는 여름에 대학원을 졸업해서 하반기에 한가하기도 했고, 코로나 때문에 어디론가 떠날 수도 없기에 내게도 일찍이 크리스마스의 설렘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이 너무 피곤하면 크리스마스 감성에 촉촉해지기 어려운가보다.)

 

원래 베를린에서 내가 참여하던 크리스마스 전통이라고는 젠다멘막트 (Gendarmenmarkt)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친구들과 글뤼바인 (Glühwein) 과 크리스마스 과자, 감자 튀김을 사먹는 정도였다. (친한 친구의 남자친구가 매년 젠다멘막트 글뤼바인 매대에서 알바를 해서 엄청 많이 마실 수 있었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취소되면서 정말로 내 손으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남이 만들어낸 분위기에 묻혀갈 수 없게 되었다. 

 

티캔들과 종이 크리스마스 트리로 베를린 아파트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 보았다

분위기를 한순간에 바꿔주는 것은 역시 캔들만한게 없겠다 싶어서, 일단 티캔들을 엄청 사왔다. 사실 크리스마스엔 역시 빨간색 촛대의 긴 양초를 피우는게 더 분위기나는 전통이지만, 덜렁미의 최고봉인 내가 긴 양초로 어딘가 불을 내는 사고를 칠게 뻔해서 일단 티캔들만 작은 유리잔에 넣어서 피우기로 했다. 이것도 나름 영롱하고 운치있다. (앞의 전혀 크리스마스스럽지 않은 코끼리 세마리는 독일 수퍼마켓 체인 PENNY에서 사은품으로 받은것. 처음 받았을 땐 내 취향이 아니라 버릴까 했지만, 이렇게 나름 캔들을 수호해주니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다음 아이템은 쇠스트레네 그레네에서 구매한 종이 크리스마스 트리. 자석이 있어서 쉽게 떼고 붙이고, 크리스마스 시즌이 끝나면 접어서 보관할 수 있다. 모서리에 금색 반짝이도 칠해져있어서 실제로 보면 아주 예쁘다. 사실 크리스마스 트리 주변에 초를 켜면 예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주변에 불에 탈 수 있는 물건이 너무 많아서 그것도 포기하고 심플하게 유지하기로 했다. (누가 보면 엄청 조심성 많은 사람인줄 알겠지만 워낙 사고를 많이 쳐서 체득된거랄까...) 북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 트리 위에 실제로 양초를 달고 초를 키고 그 주변을 뱅뱅 돌면서 노래를 부르는 전통이 있었는데, 나는 양초가 떨어져서 불이 날까봐 정말 조마조마 했었던 기억이 난다.

 

독일의 대표적인 크리스마스 과자, 뉘른베르크 렙쿠흔

내가 원래 하지 않던 것중에 하나가 크리스마스 과자를 내 손으로 사와서 먹는 것이었는데 (왜냐면 크리스마스 과자엔 예상치 못한 마지팬이 너무 많고 나는 마지팬을 별로 안좋아한다.. 특히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갑툭튀하는 마지팬) , 올해는 이 역시 한번 직접 해보기로 했다. 별 생각 없이 장을 보다가 뉘른베르크 렙쿠흔 (Nürnberger Lebkuchen) 하나를 사왔는데, 오렌지 향도 도는 것 같고 시나몬 향도 도는 것 같고 견과류도 씹혀 식감도 너무 맛있다! 지금 블로그를 쓰면서도 밀크티 한잔과 곁들여 먹고있다. 독일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된다면 꼭 한번 먹어봐야할 과자이다. 

 

12월에 직장도 학교도 다니지 않으니 조용히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한 해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겨서 기쁘다. 2020년에도 연말이 있을줄, 3월 록다운이 시작될 때는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저찌 한해는 흘러갔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듯한 한 해 속에서도 우리는 성장했고, 사랑했다.

 

12월 1일부터 강화된 독일 코로나 방역조치에 의하면 크리스마스 기간과 새해까지 가구수와 무관하게 10명까지 모임을 허용한다고 한다. 10명이나 실내에서 마스크도 쓰지 않고 모여서 크리스마스 음식을 나누는건 위험하지 싶으면서도, 올해는 집에 가지 못하는 혼자 사는 사람(=나)도 많을테니 정신건강 방역을 위한 타협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10명까지 모여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올해는 나처럼 집에 가지 못하고 남아있는 친구들이 꽤 있어서 서너명 정도가 모여서 크리스마스 디너를 가질 것 같긴 하다. 

 

그리고 올해 코로나때문에 만나지 못한 유럽 각국에 흩어져서 홀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친구들과 스카이프로 크리스마스 파티를 나눌 예정이다. 다들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안전하고 건강한 연말이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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